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고트 왕국 (문단 편집) ==== 발티 왕조의 단절 ==== 부이예 전투 직후, 서고트 귀족들은 알라리크 2세의 후계자로 지명되었던 [[아말라리크]]는 아직 어려서 난국에 처한 왕국을 이끌 수 없다고 판단하고 알라리크 2세의 사생아였던 '''[[게살레크]]'''를 새 왕으로 옹립했다. 그는 프랑크군에 의해 함락당한 툴루즈 대신 나르본을 새 수도로 삼았다. 얼마 후 프랑크 왕국과 손을 잡은 [[부르군트 왕국]]군이 나르본을 함락시켰고, 그는 피레네 산맥을 넘어 바르셀로나로 도피해 그곳을 새 수도로 삼았다. 그러나 부르군트군이 피레네 산맥을 넘어 바르셀로나를 공격하자, 그는 이에 맞섰으나 참패당하자 히스파니아 내륙으로 도주했다. 동고트 왕국의 [[테오도리크 대왕]]은 처음에는 그가 서고트 왕이 되는 걸 용인했지만, 연이은 패전을 당하는 걸 보고 등을 돌렸다. 테오도리크 대왕은 클로비스 1세와 협상해 프랑크 왕국이 아키텐을 획득하는 대신 서고트 왕국을 유지하는 걸 동의하게 한 후 군대를 파견해 바르셀로나까지 침입했던 부르군트족을 격파하여 본토로 돌아가도록 강요했다. 그 후 510년 게살레크가 자신에게 순순히 복종하지 않는 서고트 귀족 고야리크를 처형하자, 이에 위협을 느낀 귀족들은 테오도리크 대왕에게 아말라리크를 새 왕으로 추대하고 싶으니 도와달라고 청했다. 그는 이에 따르기로 하고, 511년 군대를 바르셀로나로 파견했다. 동고트군은 별다른 저항 없이 바르셀로나에 입성했고, '''[[아말라리크]]'''가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아직 어렸기에 테오도리크 대왕이 '섭정왕'으로서 서고트 왕국의 실질적인 통치를 맡았다. 테오도리크 대왕은 이탈리아에 남아 통치를 행사했고, 리우비리투스와 암펠리우스를 민사 감독관에, 테우디스를 군사 담당관에 선임하여 히스파니아를 대신 다스리도록 했다. 또한 히스파니아 신민들은 자신이 정한 로마법을 준수하라고 요구했으며, 서고트족과 동고트족의 통합을 이루기 위해 두 종족간의 혼인을 후원했다. 한편, 게살레크는 아프리카로 도주한 뒤 [[반달 왕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반달 왕 [[트라사문드]]는 동고트 왕국과 전면전을 벌일 생각이 없었기에 군사 지원을 해주지 않았지만, 거액의 보조금을 지원했다. 그는 갈리아 남부로 이동한 뒤 프랑크 왕국이 장악하고 있는 아키텐으로 이동하여 프랑크 왕국의 후원을 받아 복위를 꾀했다. 당시엔 클로비스 1세 사후 프랑크 왕국이 네 아들에게 분할되어 있었다. 이 네 명의 왕들은 권력을 확장해 상대방으로부터 복종을 얻어내길 갈망했지만, 강대한 위세를 떨치고 있는 테오도리크 대왕과 대적할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결국 그들의 후원을 받으려는 게살레크의 계획은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그렇게 몇년 간 세월을 보내다가 테오도리크 대왕의 지배에 불만을 품은 몇몇 서고트 귀족들로부터 지원군을 받아낸 후 히스파니아로 이동했다. 그러나 513년 바르셀로나 외곽에서 테오도리크의 부관 이바스에게 참패했다. 그는 전장에서 탈출했지만 뒤랑스 강을 건너려다 체포된 후 곧바로 처형되었다. 526년 테오도리크 대왕이 사망한 뒤, 아말라리크는 비로소 실권을 잡았다. 그는 히스파니아 신민들이 동고트 왕국의 수도인 라벤나로 세금을 보내는 것을 중단했지만, 히스파니아로 이주한 동고트 관료들이 계속 머무르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허용했다. 한편 지역 주민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헀다. 527년 톨레도에서 정교 사제들이 공의회를 소집하는 것을 허용했으며, 529년 현치인 출신의 스테판을 히스파니아 총독으로 세워 주민들의 의견을 수렴하도록 했다. 또한 프랑크 왕국의 군주이며 지난날 부이예 전투에서 아버지를 죽여버렸던 [[클로비스 1세]]의 딸 클로틸데를 아내로 삼는 등 프랑크 왕국과 가급적 친하게 지내려 노력했다. 그러나 클로틸데는 서고트 궁정 내에서 배척당했다. 왕국에 큰 손실을 입힌 클로비스 1세에 대한 원한이 가시지 않은 데다, [[아리우스파]]를 고수하는 귀족들 입장에서 정교를 믿는 왕비를 곱게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그 역시 마찬가지였던 듯하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그는 아내가 교회에 갔을 때 거름 등 여러 가지 불순물을 그녀에게 던지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또한 그가 아내를 너무 심하게 때려서 코피가 났고, 그녀는 피묻은 손수건을 오빠 [[킬데베르 1세]]에게 보냈다고 한다. 킬데베르 1세는 여동생의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531년 서고트 왕국의 영역에 귀속되어 있던 나르본을 침공해 서고트군을 격파했다. 아말라리크는 바르셀로나로 도피했으나 그곳에서 곧 피살당했다. <사라고사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베손이라는 이름의 프랑크인에게 살해되었다고 한다. 반면 세비야의 이시도르에 따르면, 모두에게 멸시받은 그는 자신의 병사들에게 살해되었다고 한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나르본 전투 직후 탈출을 시도했지만 마지막 순간에 잃어버린 보석을 찾고자 나르본 시로 돌아갔다가 한 프랑크인의 창에 찔러 사망했다고 한다. 킬데베르는 여동생과 지참금을 챙긴 뒤 귀환했지만, 클로틸데는 도중에 알려지지 않은 원인으로 사망했다. 아말라리크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친척 역시 알려진 바 없었기에, 알라리크부터 100여 년간 이어지던 발티 왕조는 단절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